간추린 뉴욕한인회 발자취

  • 1921년 유학생 중심의 뉴욕한인회 창립

    당시 콜롬비아대학에 유학중이던 조병욱씨가 뉴욕일원의 거류민과 한인학생들을 중심으로 한인회를 조직했다. (조병욱의 나의 회고록에서) 그러나 조병욱씨가 조직했던 한인회는 오래가지 못하고 1924년 '뉴욕한인교민단'이란 단체가 생겨 이를 이어갔다.
  • 1924년 뉴욕한인 교민단 설립

    1924년 12월 10일 뉴욕시에서 안정수, 홍득수, 리봉수, 송세인, 신성구, 허정, 라진일씨 등의 발기로 '뉴욕한인교민단'을 설립했다. (김원용저 '재미한인50년사')
  • 1949년 뉴욕총영사관 주도 뉴욕한인회 발족

    해방후 정부가 수립되고 뉴욕에는 한때 관제 한인회가 생겨 뉴욕총영사 남궁염씨가 한인회 회장이 되고, 부회장에는 부영사 최용진씨가 들어서 동지회식의 운영을 한적이 있었다.
    1952년 남궁염 총영사가 한인회장을 맡은 다음으로 1952년에 한국은행 뉴욕사무소장을 지냈던 유창순(전 국무총리)씨가 한때 한인회장 바통을 이어 받았으나 본국 전임으로 흐지부지 되었다.
    해방이후 정부수립, 6.25의 혼란기를 거치는 동안 뉴욕일원의 한인사회는 이렇다 할 단체활동이 없이 지냈다.
  • 1960년 오늘날의 뉴욕한인회 출범, 초대회장 서상복 재임기간:1960. 6.12-1961.1.7

    1960년6월12일(일요일)에 뉴욕한인회가 창립됨으로써 오늘날의 뉴욕한인회가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이날 오후3시 뉴욕한인교회에서 개최된 뉴욕한인회 창립총회에는 약40명의 한인들이 참석했는데 이날 한인회 설립준비위원회를 대표하여 강한모씨의 사회와 김승만씨의 지휘로 애국가를 제창했다.
    뉴욕한인회 발기회가 1개월여동안 준비해온 「뉴욕한인회규칙」을 확정하고, 뉴욕한인회 초대회장에 서상복씨를 선출했다. 창립첫해 한인회 예산은 7백45달러10센트였다.
    서상복씨는 1934년 미국에와 1938년 브로드웨이50가에 한인최초의 무역상「동진무역회사」를 설립하고, 이승만, 김구, 서재필박사등과 함께 조국의 독립운동을 펼쳤다.
  • 1961년 제2대회장 강한모 재임기간: 1961.1.8-1962.12.1

    1961년 1월8일 제2대 회장으로 선출된 강한모씨는 뉴욕한인회 발기대회에서 사회를 맡는등 뉴욕한인회의 창립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재임기간중 「한인소식」지를 발간하여 1회 5백부가량을 인쇄해 교포 가정에 배달하는 등 여러 가지 업적을 남겼다.
    강회장은 초대 한인회에서 간사, 3대와 5대 한인회에서는 실행위원을 맡아서 초기 한인회 활동에 있어 크게 공헌하였다. 당시 회장의 임기는 1년으로 되어 있었으나 재선되어 2년동안 회장직을 수행했다.
  • 1962년 제3대회장 김형린 재임기간 : 1962.12.2-1964.12.20

    강한모 제2대 회장과 마찬가지로 재선되어 2년동안 뉴욕한인회를 이끌었다.
    한인회장에 선출되자마자 교포어린이들을 위해서 자신이 다니던 뉴욕한인교회에 「뉴욕한국어학교」를 설립하고 교포2세들의 국어쓰기운동에 앞장서는등 2세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김형린회장은 1921년 미국으로 유학와서 아이오와주 듀북대학에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시카고 대학원에서 행동심리학과 교육심리학을, 1931년 하버드대학원에서 실험심리학박사 과정을 수료했으며, 다시 1956년 콜롬비아사범대학원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가로서 미국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 1964년 제4대회장 송안나 재임기간 : 1964.12.21-1965.12.

    지금까지 유일한 여성회장이었던 송안나회장은 당시 뉴욕에 많이 거주한 한국간호원들의 지위와 복지향상에 열정을 기울였다.
    재임기간중 창립이후부터 매년 맨하탄 북쪽에 위치한 밴 코틀랜드 파크 (Van Courtland Park)에서 개최해온 한인야유회에 5백여명의 교포들이 참석, 당시로서는 큰 성황을 이루었다.
  • 1965년 제5대 회장 한영교 재임기간 : 1965.12. - 1966.12.3

    뉴욕한인회 창립당시 여러 원로들과 함께 한인회 창립에 참여했으며, 재임기간중 당시 총무, 재무, 서기를 겸임했던 송선규씨의 활약으로 1966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 행사로 콜롬비아대학 얼홀에서 천연색 영화 「성춘향」을 상영하여 4백여명의 교포들이 이를 관람하기도 했다.
    1937년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한 한회장은 제5대 뉴욕한인회장을 역임한 이후에도 뉴욕한인연합교회, 롱아일랜드한인교회 담임목사, 대뉴욕지구교역자 회장, 대뉴욕지구 한인교회협의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
  • 1966년 제6대 회장 이범선 재임기간 : 1966.12.4-1968.1.26

    1966년 12월 3일에 실시된 뉴욕한인회 제7차 정기총회에서 제6대 회장으로 선출된 이범선회장으로부터 시작되는 제2기 해방후 유학생 중심 세대에는 한인회를 이끄는 인물들이 대부분 새로운 인물들로 바뀌어 이른바 세대교체를 이루게 되었다.
    이범선회장 재임시 「한인주소록」과 「한인통신」을 발간하여 교포들의 유기적인 연락을 도모했으며, 그때까지 한인회 연락처로 쓰이던 뉴욕한인교회에서 나와 당시 한인회 이사였던 유민철씨의 사무실 (맨하탄 34가 매디슨 에비뉴 소재)을 빌어서 쓰는 한편, 한인회 공식 주소로 우편함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의 한인회 공식주소는 The Korean Association of New York G.P.O.Box 587 Brooklyn, NY 11202였다.
    이범선회장의 제의로 「한국문화센터」가 설립되고, 1966년 12월 23일 제1회 「코리언 나이트 볼」이 열림으로써 「뉴욕한인회회관건립기금모금」이 시작되었다. 당시 모금액은 4천여 달러였으며 KCC구좌에 입금되었다.
    이범선회장은 뉴욕한인회 창립때 학생의 신분으로 참여했다가 학업을 위해서 잠시 한인커뮤니티를 떠났으나 박사학위를 받은 후 다시 교포사회에 복귀하여 젊은 세대의 기수로서 한인회의 분위기를 일신했다.
  • 1968년 제7대 회장 김판기 재임기간 : 1968.1.27-1969.1.24

  • 1969년 제8대 회장 장용호 재임기간 : 1969.1.25-1970.1.30

  • 1970년 제9대 회장 남병학 재임기간 : 1970.1.30-1971.1.29

    뉴욕한인회 사상 최초의 교포2세 출신 회장인 남병학회장은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하와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뉴욕대학으로 유학와서 당시 최초의 교포변호사가 되어 교포들의 애로사항을 무료로 해결해 주며 한인회 회장 재임시 매달 개최한 한인회 이사회를 한인회 간부들의 자택을 돌아가며 소집해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남회장은 뉴욕에서 변호사 생활을 한후 1974년 하와이로 다시 돌아갔다.
  • 1971년 제10대 회장 손재룡 재임기간 : 1971.1.30-1972.4.7

    재임기간중 뉴욕한인회 회칙을 개정하여
    ● 회장의 임기를 2년으로 연장하고
    ● 회장선거를 4월에 실시토록하는 한편
    ● 유급 사무총장제를 도입했다.
    임기중 교포위안행사 개최에 특히 역점을 두었던 것으로 알려진 손회장은 연말 「나이트 볼 행사」개최를 놓고 한국문화센터(KCC)와 분쟁을 벌였는데 손회장이 뉴욕한인회 회장에 선출되기 전 KCC의 이사중 한사람이었던 손회장은 「KCC는 뉴욕한인회의 전회장들이 중심이 돼 만든 단체로 이는 한인회라는 기둥뿌리에서 KCC라는 가지가 생겨 난 것과 같다」며 「당시 나이트 볼 행사에서 모아진 기금을 뉴욕한인회로 이관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 1972년 제11대 회장 조시학 재임기간 1972.4.8-1974.4.19

    1971년에 있은 두 번째 회칙 개정에 의해 임기 2년의 첫 한인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1972년 12월 16일 KCC와 별도로 「한국의 밤」행사를 개최하고, 1973년 4월 10일 뉴욕주정부로부터 「비영리단체」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
    또한 재임기간 중 두 차례에 걸쳐 센트럴파크에서 「아시아 축제의 밤」행사를 개최해 태권도와 한국민속을 미국인들에게 소개했으며 뉴욕한인회 주최로 「제1회 미스뉴욕선발대회」를 개최했다.
    1958년 미국으로 유학와서 일리노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마치고 뉴욕의 버룩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조회장은 이후 버룩대, 프랫인스티튜트, 세인트존스대, 퀸즈보로커뮤니티칼리지등에서 태권도 강의를 했다. 태권도를 통한 국위선양으로 1978년 한국정부로부터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상한 바 있다.
  • 1974년 제12대 회장 김정원 재임기간 : 1974.4.20-1975.10.18

    김정원회장은 취임후 한인회 사무실을 101 파크에비뉴에 별도로 마련하고 매달 3백50달러의 렌트를 지불했으며 이때부터 유급사무총장을 풀타임으로 임용했다. 1974년 7월 한국무역협회가 한국센터빌딩(현재 뉴욕총영사관이 입주해 있는 건물)을 매입함에 따라 한인회 사무실을 무료로 제공받아 1975년 7월 입주해서 현재의 뉴욕한인회관으로 이전하기까지 10여년간 이 사무실을 뉴욕한인회 사무실로 사용했다. 또한 김회장은 교포사회에도 전문적인 이익단체들이 생성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각 교포직능단체등의 발족을 유도했다. 이대 식품업자, 의사, 보험인들의 전문단체들이 발족했다. 김회장은 임기만료 6개월을 앞두고 개인사업(변호사)을 위해서 회장직을 사퇴했다.
  • 1975년 제13대 회장 김상수 재임기간: 1975.10.19-1976.4.9.

    제12대 김정원회장이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중도에 사퇴하게되자 당시 부회장이었던 김상수씨가 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재임시 한국문화센터 (KCC)와 공동으로 「코리안 나이트 볼」행사를 개최했으며, 1976년에는 「교포위안의밤」행사와 「한인회의 문제점 해결을 위한 청문회」를 개최했다.
    또한 이사회에서는 회장선거세칙에 피선거권자의 자격요건으로 ▲ 뉴욕에서 5년이상 거주한 교포 ▲ 대한민국의 혈통을 이어 받은자 ▲ 전직회장 3인 이상의 추천을 받은자 등을 첨가할 것을 결의했다.
    이 사회의 결의가 일부교포들로부터 「당시 한인회장에 출마하려던 김재택 박사의 등록을 막으려는 불순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사기도 했다. 결국 당시 뉴욕거주기간이 5년에서 불과 3개월 부족한 김재택씨가 회장선거 출마를 철회하고 김정희씨가 단독 출마해서 제14대 회장에 당선됐다.
  • 1976년 제14대 회장 김정희 재임기간 : 1976.4.10-1978.4.29

    김재택박사의 회장 출마 철회로 단독 입후보해 1976년 4월 10일 정기총회에서 무투표당선 됐으나 재임초기에 「입후보 하려던 상대방 (김재택)에게 불리한 선거세칙이 적용돼 결국 출마를 포기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나선 일부인사들은 1976년 12월 4일일 「뉴욕한인연합회(회장 김재현)」을 발족시켜 1년여동안 교포사회가 양분되기도 했다.
    김정희 회장은 1977년 본국을 방문하여 교포2세들의 한글교육에 필요한 교재를 기증받았으며, 한국에서 이리역 폭발사고가 터지자 「이리역 화약폭발 참사 이재민돕기 모금위원회」를 구성하여 2천3백달러를 모금하기도 했다.
    또한 1977년 10월 1978년 1월에 교포 곽종호씨와 백남실씨 피살 사건이 발생하자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경찰의 철저한 수사와 함께 조속한 범인 검거를 강력히 촉구했다.
  • 1978년 제15대 회장 이성종 재임기간 : 1978.4.30-1980.4.27)

    제14대 회장때 까지는 주로 유학생 출신들이 뉴욕한인회를 이끌어 왔던 것과는 달리 제15대 이성종회장부터는 대체로 실업(사업)이민자들이 중심이 되어 한인회를 이끌어 나가게 됐다.
    또한 이전까지 한인회를 친목과 봉사단체로만 여겨왔던 교포들도 한인사회의 구심점으로서의 한인회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회장선거도 점차 가열되는 분위기였다.
    제15대 한인회가 출범하자 1976년 12월에 창립해 독자노선을 걷고 있던 「뉴욕한인연합회」로 교포사회의 단합과 발전을 위해 자체 해산을 결의하고 한인회에 동참하여 화합의 분위기를 창출했다.
    이성종 회장은 뉴욕시와의 유대에도 노력을 기울여 당시 '에드워드 카치'사장이 1979년 8월 15일을 「한국의 날」로 선출하는데 기여했다.
    또한 교포이민 역사상 최초로 한인회 간부들을 비롯한 12명의 교포인사들이 백악관 만찬에 초청되기도 했다.
    1979년말에는 「코리안 나이트 볼」행사를 한국문화센터 (KCC)와 별도로 거행, 자체 모금하여 임기를 마치면서 회관건립기금 2만5천달러를 차기 한인회에 이월하는 실적을 올렸다.
  • 1980년 제16대 회장 박지원 재임기간 : 1980.4.30-1982.4.24

    38세의 최연소 한인회장에 당선된 박지원회장은 취임후 1981년 「한·미수교 100주년」을 맞아 뉴욕시 카치시장이 1982년을 「한·미 우호의 해」로 선포할 정도로 뉴욕시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재임시 뉴욕시민들에게 한국을 소개하는 「코리언 퍼레이드」를 처음 개최하고, 「아름다운 축제」, 고교생 배구대회, 학생음악경연대회, 청소년을 위한 바자회, 청소년 데이 캠프 등 교포청소년들의 건전한 생활을 유도하기 위한 다양한 행사들을 개최한 바 있다.
    또한 당시 할렘, 자마이카, 브루클린 등지에서 발생하기 시작한 교포상인들과 흑인주민들과의 마찰을 해소하기 위해 해당지역의 교포상인들을 찾아다니며 이같은 문제에 대해 공동대처 할 것을 권유, 할렘상인 번영회, 자마이카 한인상인 번영회, 써니사이드 자치회등 지역 상인단체들이 탄생하는데 기폭제 역할을 했다.
  • 1982년 제17·18대 회장 강익조

    재임기간 : 제17대 1982.4.25-1984.4.14 / 제18대 1984.4.15-1986.4.30 1982년부터 1986년 4월까지 4년간에 걸쳐 17대와 18대 한인회를 이끌었던 강익조 회장은 임기중 자신이 내건 「회관건물구입」공약을 실현시키기 위해 범교포적인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1983년 10월 27일 현재의 회관건물을 구입했다.
    1984년 「강익조 한인회장 재선 추진위원회」의 강력한 지지를 받아 18대회장에 재선된 뒤 17대에서 마무리 짖지 못했던 한인회의 회관입주를 실현시켰다. 그동안 한인회 사무실로 사용하던 한국무역협회빌딩에서 1085년 7월 9일 한인회 회관 3층으로 입주했다.
    1975년 이후 한인회의 불성실한 세금보고로 인해서 한때 뉴욕주로부터 박탈당했던 비영리단체로서의 면세혜택을 회복시켰다.
    한편 1983년 9월 1일 KAL기 참사와 10월 8일 미얀마 랭군 폭탄 참사가 잇달아 발생하자 한인회를 비롯하여 교포들의 궐기대회와 각종 규탄 행사를 벌였다.
    1984년 4월 30일 낮12시 역대 한인회장과 한인사회 단체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인회관 앞에서 「회관현판식」을 가졌다.
    한인회관현판은 「뉴욕한인회」라고 한글로 쓰여 있으며, 글은 오법안스님이 쓰고 김호균씨가 길이 220인치, 높이27인치, 두께 1 3/4인치의 목판에 새겼다.
    1984년 제1회 「한인사회를 빛낸 사람들」시상식 개최
  • 1986년 제19대 회장 조병창 재임기간 : 1986.5.1-1988.4.30

    조병창회장은 단독출마하여 제19대 회장에 당선된 후 특별기구로서 「복지재단위원회」,「회관관리위원회」,「총인구조사위원회」를 구성해 당시 폭주하던 한인회 업무를 전문화했으며 각 업무에 전문가들을 배치, 한인회의 업무와 활동의 효율화·전문화를 기했다.
    '복지재단'은 차이나타운에 있는 「중국개발협회 (Chinese Developing Council)」처럼 미정부로부터 보조를 받을 수 있는 한인봉사기관으로 발전시킨다는 취지하에 설립, 당시 교포들이 모금한 20여만 달러 외에도 유나이티드웨이사와 필립모리스사로부터 각각 그만 달러씩 4만달러의 복지 기금을 지원 받았다.
    당시 복지재단에 대한 교포사회의 가장 큰 관심은 중앙일보사와 공동으로 벌인 「사면자 가족 상봉사업」이었다.
    미정부의 서류미비자에 대한 특별사면 조치로 많은 교포들이 사면을 받게 되자 오랫동안 헤어져 살아야 했던 사면자 가족들의 미국 상봉을 주선, 당시 케네디 공항은 이들의 상봉으로 울음바다를 이뤘다.
    또한 한인회 사무의 전산화를 기하는 한편 「총인구 및 교포실태 위원회(위원장 이헌진)」를 설치하여 1988년 교포인구 및 실태조사에 착수했으나 막대한 경비와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1990년에 있는 연방인구통계국의 인구조사와 맞물려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 1988년 제20대 회장 이문성 재임기간 : 19880.5.1-1990.4.30

    단독입후보 당선
    1988년 7월 19일 「뉴욕한인회 회칙개정심사위원회(위원장 김정희)」회의에서 이문성회장은 그 동안 사용해 오던 「뉴욕한인회 (The Korean Association of New York)」명칭을 「대뉴욕한인회 (The Korean Association of the Great New York)」로 변경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 계획안을 동위원회에 정식 상정했다.
    재임중 「청소년 대축제」 (1989.5.20-5.27일까지 8일간)외에도 한인회 산하에 「교육문화재단」과 「한국대학」등을 설립, 2세들을 위한 교육사업에 역점을 두었다.
    문화·체육행사는 물론 부모와 자녀가 함께 하는 토론회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청소년 대축제」행사는 교포2세들에게는 한인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동참의식을, 교포1세들에게는 한인사회의 미래를 짊어지고 갈 2세들에 대한 관심과 이해와 배려의 중요성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 1990년 제21대 회장 변종덕 재임기간 : 1990.5.1-1992.4.30

    1990년 1월부터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한인상인배척시위」에 직면해 처치애비뉴사태와 같은 사건이 또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뉴욕시 소수민족계 인사들로 구성된 「한·미 친선 방문단」을 이끌고 한국을 방문 했으며, 이후 이 방문단을 주축으로 「소수민족 화합위원회 (ECHO)」FMF 결성했다.
    또한 20대에서 활동이 주춤했던 복지재단 (위원장 박상운)을 활성화시키고 전대에 이어 「청소년 축제」를 개최하고, 후반기에 들어서는 「사랑의 터키 보내기 운동」을 전개했다.
  • 1992년 제22대 회장 김재택 재임기간 : 1992.5.1-1994.4.30

    현직 대학교수로 뉴욕한인회장에 당선된 김재택박사는 「힘있는 한인사회건설」,「힘있는 한인회 건설」이라는 2대 기본 지침을 내걸고 재임기간중 다각적인 대외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한인들이 미국 주류사회에 깊이 참여 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고 한인사회의 위상을 정립시키는데 괄목할 성과를 거두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뉴욕한인회관실태보고서」를 발간하여 한인회관의 실상과 문제점을 교포사회에 소상하게 밝힘으로써 교포들이 한인회관에 대한 주인의식을 갖고 문제해결에 적극 동참하여 부채의 상당부분을 갚고, 한국계 은행들로부터 년 6%이자의 75만 달러를 융자받아 악성 모게지를 청산했다.
  • 1994년 제23대 회장 주명룡 재임기간: 1994.5.1-1995.5.30

    1994년 4월10일 실시한 제23대 뉴욕한인회장 선거에서 주명룡씨가 신만우,이정화 후보를 제치고 당선됐으나 신만우씨가 제기한 부정선거 법정소송으로 진통을 겪다가 1995년 1월20일 무조건 사퇴를 표명하고 조기 퇴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짧은 임기 중 「더불어 사는 한인사회」,「다시 나가는 한인사회」라는 그대 지침을 강력히 추진하는 한편 본국과 협력체제 강화에 노력했다. 1994년 11월16일 서울에서 열린 「교포사회 바로 알고 바로 알리기」심포지엄에 참석한 주회장을 비롯한 10명의 방문단은 한국정부에 한글학교 설립을 요청하고 정부가 교포2세 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보여 줄 것을 당부했다.
  • 1995년 제 24대 회장 이정화 재임기간 : 1995. 6.1-1997.4.30

    제 24대 회장에 무투표 당선된 이정화 회장은 「2세들에게 문화 유산 전수」와 「한인사회내 역할 분담 및 조정」을 한인회의 과제로 내걸고 24대 한인회를 출범시켰다.
    제24대 한인회 출범 후 첫사업으로 1995년 6월 27일 뉴욕교포들이 본국의 경희의료원에서 진료 및 치료를 받을 경우 본국의 의료보험 수혜자들과 동등한 비용과 예우를 적용하는 의료계약을 경희의료원과 체결했다.
    또한 한인회관의 숙원사업인 낡은 엘리베이터 교체 및 비새는 지붕수리를 위한 기금 모금행사를 개최하여 모금된 기금으로 3개월간의 공사를 마무리하고 1996년 10월8일 엘리베이터 가동식을 가졌다. 1983년 회관건물 매입 이후 역대 한인회가 회관부채에 따른 부담으로 본연의 업무에 차질을 빚는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상황에서 회관운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1997년 4월10일 한인회관 운영의 독립채산제를 의무화 시키기 위한 회칙을 개정하고 「회관관리운영 위원회」제도를 10여년만에 부활시키고 위원장에 하세종씨를 선출했다. 회관부채 회장 발목잡기에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도 24대 한인회는 한인사회 「뿌리다지기」와 청소년행사 지원, 안전한 한인사회 구축을 위한 뉴욕시경과의 유대강화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 1997년 제25대 회장 신만우 재임기간 : 1997.5.1-1999.4.30

    제25대 회장선거에서 단독 입후보한 신만우가 1997년 3월14일 무투표 당선됐다.
    제25대 한인회 출범 첫 사업으로 뉴욕한인 봉사센터가 실시해오던 공중보건 프로그램 중 일부를 한인회관으로 이전해 한인진료소 설치와 의료보험등의 프로그램을 공동으로 추진하기로 뉴욕한인회와 뉴욕한인 봉사센터가 1997년6월4일 정식 합의하고 뉴욕한인 봉사센터 공중보건팀이 5일 한인회관에서 첫 업무를 시작했다.
    1997년 9월22일부터 25일까지 러시아에서 열리는 구 소련 고려인 중앙 아시아 강제이후 60주년 기념행사를 계기로 각국교포사회와 교류확대를 추진하는 한편 한,유태계 상호협력을 위한 지도자 정례모임을 창설하기도 했다.
    1998년5월 "한국연예인들의 아틀란틱 시티 카지노 공연이 동포사회 도박을 부추기고 있다" 는 탄원서를 청와대에 제출해 한국 가수분과 위원회로부터 탄원서를 수용하고 카지노 공연을 자제하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뉴욕동포사회에 범동포적 차원의 유권자등록 운동을 위한 네트웍(Net Work)을 구성하고 조직적 운동 전개를 위해서 한인회로 창구를 일원화 됐다.
    1998년4월21일 전반기 4차 정기 이사회에서 「뉴욕한인회에서 뉴저지를 분리」하는 회칙 개정안 마련 「뉴욕을 비롯해 뉴저지와 커네티컷등 3개주를 관할도록 되있는 현행 규정은 현 실정에 맞지 않다」는 것이 회칙개정 초안 작성의 배경이었다.
  • 1999년 제 26대 회장 이세종 재임기간 : 1999.5.1-2001.4.30

    1999년 4월11일 실시된 제26대 회장선거에서 「미국속에 한국을 알리는 전문 로비스트가 되겠다」는 기치를 높이 들고 출마한 젊은 세대 이세종(당시38세) 후보가 선택됐다.
    취임후 한인사회와 주류사회 연계작업에 역점을 두고 한인사회를 미주류사회에 접목시키는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결과 성공적이엇다는 평가를 받았다.
    취임 초 뉴욕주 하원 브라이언 맥라글린의원과 연방의원 게리 액커만의원을 만나 한인사회 발전에 관해 논의하고 또한 2000년 1월18일에는 뉴욕의 62개 유태인 단체를 대표하는 뉴욕 쥬이쉬 지역관계회의 (JCRC)와 첫공식 모임을 갖고 양 커뮤니티 협력방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뉴욕한인회관을 한인 이민자들의 정착을 지원하는 커뮤니티 센터로 활용하는 방안을 뉴욕한인 봉사센터와 공동으로 추진하는 계획에 대해 2001년 2월15일 제26대 4차 정기이사회에서 「한인회관을 뉴욕한인 봉사센터와 공동운영」하는 것을 골자로한 회관관리위원회 정관 개정안을 통과 시켰다. 그러나 회관의 세입자 퇴거거부 법정소송 장기화와 심각한 자금압박으로 인해서 진척을 이루지 못했다.
    1999년 9월 뉴욕한인회 영자신문(KAANY NEWS)을 창간하고 창간호에는 제26대 뉴욕한인회 출범, 동포시회소각 및 한국소식등이 실려 있었다. 창간호는 4천부가 발행돼 정부,기업체, 공공단체등에 무료로 배포되었다. 이 역시 자금과 인력 부족으로 1회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또한 재임기간중 맨하탄 이스트 빌리지 노조 시위 사태와 일본의 교과서 역사 왜곡 규탄대회등 현안문제들로 인해서 당초계획 추진에 차질을 가져왔다.
  • 2000 ~ 현재

    2001년 제 27대 회장 김 석 주 재임기간 : 2005.5.1 ~ 2003.4.30

    2001년 3월18일에 실시한 제 27대 회장선거에서 한인회장 선거 사상 가장많은 유권자들이 참여(유효투표 12.553)해 6천3백여표를 얻은 김석주 후보가 당선됐다.
    취임초 '2001년 세계 한인회장단 회의' 에 참석한 김회장은 2001년 7월10일 청와대에서 영부인 이희로여사와 단독면담을 갖고 '동포들의 정치력 신장 및 1.5세, 2세들의 미정계 진출현황과 동포 청소년 선도 문제에 대해서 설명했다.
    제 27대 한인회가 의욕적인 출발을 하고 정상궤도에 진입하기도 전에 9.11테러 참사가 발생하여 공약사업 추진에 제동이 걸리고 연례행사인 '코리언 퍼레이드'행사가 취소되는 등 한인회의 제반업무가 한동안 마비가 되었다. 한인회와 각 언론사가 '9.11테러 피해자 돕기 사랑의 성금'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모금한 총 49만8 45달러 중 8만2천2백13달러는 미 적십자사 뉴욕지부에 전달하고 나머지 41만5천8백32달러는 줄리아니 뉴욕시장에게 전달했다.
    2001년 11월WB11 '개고기 왜곡보도'와 관련 '특별대책 위원회(위원장 박윤용)'를 구성하고 강력하게 항의한 결과 WB11부터 두 차례에 걸친 유감표명 서한을 받아냈다.
    한인청과 델리업소를 상대로 한 로칼 169노노시위에 한인사 차원의 대응을 위해서 2001년 4월20일 「한인상권보호 위원회」를 구성하고 뉴욕한인회 산하단체로 편입, 6월1일 한인1천여명이 로칼169노조 사무실 건물 앞에서 노조의 부당행위를 규탄하는 가두시위를 벌였다.
    2001년 5월23일에는 김석주회장들 한인대표 4명은 엘리옷스피처 뉴욕주 법무국장과 만나 169노조문제를 비롯한 한인사회 현안에 관해서 논의하고 한인사회의 입장을 전달했다.
    '새천년을 주도하자'는 기치아래 2001년7월21일,22일 양일에 뉴욕 한인회 주최 '제2회 대민족 여름 대축제'가 퀸즈 보테니칼 가든에서 열렸다. 이 축제에서 한인들의 정치력 신장을 위해 유권자등록과 투표기계 작동요령 습득, 헌혈 운동을 실시했다.
    한인이민 1백주년 기념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미주한인 이민 100주년 대뉴욕 기념사업회' 초대회장에 김석주회장이 선출(2002년 3월1일)되었고 2002년 7월15일 조병태씨가 공동회장으로 선임되어 현재까지 활발하게 활동중에 있다.

    2003년 제 28대 회장 김 기 철 재임기간 : 2003.5.1~2005.4.30
    20여년간 뉴욕한인사회의 지속적인 활동과 참여로 한인사회 전반에 대한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갖춘 김기철 회장, 이경로 수석부회장의 취임으로 2003년 5월 1일 제 28대가 출범했다. 출범 직후 노무현 대통령의 뉴욕방문을 맞아 반미, 북핵문제, 재외동포특례법등 동포사회현안들을 본국정부에 전달한 것을 시작으로 28대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집행부는 수시로 야외새벽회의를 통해 효율적이며 진취적인 회의문화를 정착시키고 솔선수범하는 기동력을 갖추게 하는 한편, 연속성과 전문성을 갖춘 이사회를 구성하여 코참회장을 역임했던 김영덕 박사가 전.후반기 이사장에 선출되었고, 예년과 달리 이사들을 실행이사와 후원이사로 구분해 최고 의결기구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게 하였다.

    사무국과 한인회관 업무의 연속성과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해 전대의 직원을 그대로 유지하는 한편, 사무국 운영, 자료실 운영, 각종 행사, 회관 관리, 시설관리 등 한인회 운영에 필요한 규범집을 발간하여 운영의 기본원칙과 발전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전세계 한인회 웹사이트 1등상을 수상하여 뉴욕한인회의 위상을 전세계 한인들에게 알리는 계기를 마련하였던 뉴욕한인사회 종합 포털사이트인 뉴욕한인회 인터넷 홈페이지 www.nykorean.org를 개설하는 한편, 민원실을 새롭게 설치하여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해 각종 민원을 접수.해결하고 신속한 정보를 제공하였으며 사무국과 한인회관의 재정을 엄격히 분리, 홈페이지를 통한 투명한 공개운영을 실현하였다.

    또한 정치력신장위원회, 사회복지위원회 등 특별기구를 설치하여 미주류사회 진출과 여러 소수민족들의 화합과 협력 모색함과 동시에 유권자등록 운동을 강화하여 20% 미만이었던 한인 커뮤니티의 투표율이 67%로 상승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접수된 민원을 자체적 또는 유관단체와 함께 해결하는 등 적극적인 대동포사회 봉사활동을 전개하였다.

    홍명훈 위원장을 필두로 8명의 위원들로 구성된 회관관리위원회는 20여년간 체납되어온 회관관련 벌금 티켓을 거의 모두 해결했으며, 노후화된 회관시설의 수리와 청소, 엘리베이터, 보일러, 창문 등의 대대적 수리, 악성 테넌트 개별접촉을 통한 해결책 모색으로 회관정상화에 괄목할 만한 업적을 이루었으며, 한인회관 렌트비의 현실화와 함께 부동산세를 대폭 감면받는 등 수익 증대를 위한 노력으로 뉴욕한인회관 재정은 실질적인 흑자운영이 가능하게 되었다.

    2003년 11월 13일 구성된 회칙개정위원회는 위원장 김재택 박사와 총 9명의 위원들이 1년이 넘는 시간동안 시대와 상황에 맞는 회칙개정안 작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회칙개정안은 한인회장 선거에서 러닝메이트 제도를 폐지, 회장 후보만 출마하도록 하고 조정위원회, 역대한인회장단협의회, 한인단체장연합협의회 신설을 골자로 하고 있으며, 2번의 공청회를 걸쳐 2005년 4월 26일 여러 단체대표들과 300명이 넘는 한인들이 참석한 제28대 뉴욕한인회 정기총회에서 참석자 3분의 2이상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한인동포 동참운동 및 각종 사업, 행사등을 전개하여 많은 한인들이 한인사회행사에 일원으로써 동참하는 것을 계기로 그동안 한인동포사회에 대한 무관심과 부정적인 인식을 바꾸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2003년 6월 2일부터 범동포적으로 전개된 한인회비 납부운동을 통해 4천명에 육박하는 회원이 기부금을 포함해 10만여불의 회비를 납부하여 많은 동포들의 관심과 참여를 실감하게 했으며, 또한 맨하탄 32가 브로드웨이에서 개최한 연례행사인 코리안퍼레이드 및 민속야외장터 행사에서는 5만명 이상의 도상관람객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뉴욕한인사회 뿐만 아니라 미주한인회 총연합회 전체회의에서 동참을 호소, 전 미주에 있는 각 도시한인회가 참여하였던 “700만 재외동포 바로 알리기” 캠페인을 통하여 본국에서 잘못 인식되고 있는 해외동포의 시각을 바로잡고자 김기철 회장을 위시한 한인회 회장단 일행은 본국에서 개최된 세계한인지도자대회 참여 및 각 정당 및 유관단체들을 방문하여 적극적으로 홍보하기도 했다.? 또한, 뉴욕한인회 웹사이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재외동포특례법 통과를 위한 국회의원에게 e-mail 보내기 운동”에 많은 한인동포들이 참여해 본국의 국회의원들에게 e-mail을 보내 재외동포특례법 통과를 촉구했다.

    매주 월요일 30분간 라디오방송 ‘사랑방 한인회’ 시간을 마련하여 한인회 활동상황과 사람 찾기, 각종 한인사회 소식들을 전하였고, 뉴욕한인회지가 아닌 뉴욕한인사회 대변지 역할을 감당하였던 ‘뉴욕코리안’을 발행하여 동포들에게 친숙한 한인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였다.

    예전 모금행사에서 행사 주최 단체들의 난립과 중복으로 인한 폐해를 줄이고자 각종 주요 모금 행사에서 뉴욕한인회과 주최가 되어 창구를 일원화함으로써 비용과 부담을 줄이고 혼란을 방지하는 효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동포사회 경로사상 고취를 위해 이용협회, 미용협회와 협의, 시범적으로 뉴욕일원 이.미용업소에서 경로우대요금제도를 실시하게 하는 한편, 뉴욕한인동포들의 질병예방과 건강증진을 도모하기 위해 사단법인 한국건강관리협회와 협약을 체결, 한국내에서 적용되는 보험수가에서 10% 할인된 비용으로 종합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김기철 회장은 2004년 6월 세계한인회장대회에서 의장으로 당선되어 대회를 이끌었으며, 이후 재유럽한인회 총연합회, 스페인한인회, 독일한인회등을 방문하였고, 그 후 재유럽한인회와의 교류를 통해 경제, 문화, 교육 방면에서 상호발전방향모색과 한민족간 유대강화를 실현하기 위한 실질적인 상호교류를 시작하여 세계 속의 뉴욕한인회로써의 면모를 다지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2005년 5월 2일 김기철 회장의 임기 마감과 함께 제28대 수석부회장을 역임한 이경로 회장이 제29대 신임회장에 취임함으로써 뉴욕한인회의 활동은 연속성과 전문성을 더욱 확고히 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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